참 예쁜 계절이다. 봄은 꽃을 피우고, 싹을 틔우고, 낭만을 깨운다. 어딘가에서 연인이 생겨나고, 꽃잎이 맺힌 거리를 따라 길을 걷고, 귀 가까이 서로에게 고운 말들을 속삭인다. 햇볕은 따뜻하고, 눈부시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때렸다가도, 곧 다시 햇살이 내리쬔다. 참 예쁜 계절이다. 그런데 이 봄이 누군가에겐.

참 아픈 계절이다. 봄은 공채를 피우고, 면접을 틔우고, 취준인을 깨운다. 어딘가에서 직장이 생겨나고 출근길을 걷고 싶겠지만, 대부분의 취준인과는 무관한 이야기다. 각종 공채와 면접, 입사시험이 몰려있는 이때. 수천, 수만, 수십만의 이력서가 쓰이고, 자기소개서가 쓰인다. 그리고 이들 중 대부분은 파쇄기에 고이 갈려 떨어진다. 흩날리는 벚꽃 잎마냥.

누군가는 이 취업을 위해 스무 해가 넘도록 자신을 갈아 왔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 취업을 위해 사회가 요구하는 갖은 스펙을 쌓아 왔을 것이다. 그러나 취업을 준비하는 과정도, 취업해가는 과정도 무엇 하나 평등하지 않다.

취업 준비할 돈이 없다

자본주의 사회다. 먹고 살기 위해선 취직을 해야 한다. 먹고 살아야 시장에 돈이 돌고, 돈이 돌아야 경제활성화고 뭐고 될 것 아닌가. 박근혜 대통령님의 위대하신 공약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취업은 당면 과제다. 그러나, 취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취업을 준비하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취업을 준비한다는 것. 토익을 보고, 회사가 원하는 각종 스펙을 쌓고, 봉사활동과 어학연수를 다니고, 비슷비슷한 스펙들 중,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특징과 장점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다시 학원에 다니고, 공부를 하고. 그런 준비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특권이 되어 버렸다. 돈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이야기이다. 준비조차 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인 이들이 너무 많다. 학자금대출을 갚기 위해 알바를 하고, 다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알바를 하고, 하루를 벌어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과연 취업을 준비할 수 있을까.

그 전 단계로 내려가면 차별은 더욱 명백해진다. 사실상 취업의 문턱이 갈린다는 대입을 보라. 좋은 대학교에 갈 수 있는 이들은 정해져 있다. 노력을 통해 뛰어넘을 수 있는 부분은 한정되어 있다. 한국사회에서 노력은 신화일 뿐이다. 지난 2013년, 서울대가 국회에 제출한 ‘신입생 특정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당해 신입생 중 아버지의 학력이 대졸 이상인 학생은 83.1%에 달했다.

지난 1월 발표된 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아버지 학력과 자녀의 학력을 교차 분석한 결과를 보라. 아버지의 학력이 높을수록 자녀의 학력도 높게 나타났다. 아버지의 학력이 중졸 이하라면, 자녀의 학력 또한 중졸 이하인 비율이 16.4%였다. 아버지의 학력이 고졸 이상일 경우, 자녀의 학력이 중졸 이하일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

차별은 여전하다

어찌어찌 해서, 취업을 준비해 그 문턱까지 도달했다고 해도, 차별은 여전하다. 아니 오히려 다양하다. 성차별부터 외모, 집안과 출신에 따른 차별까지. 정부가 취업과정에서의 차별을 줄이겠다며 표준이력서를 도입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한국의 토끼는, 여전히 경찰이 될 수가 없었다. 한국의 여우는, 여전히 뒤통수나 치는 교활한 족속일 뿐이다.

온라인 취업포털 사람인이 760개 기업을 대상으로 ‘입사지원서 사진 항목 평가’를 조사한 결과, 93.4%가 입사지원서에 사진 항목이 포함되어 있고, 이들 중 66.6%는 사진을 제출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준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66.2%는 감점시켰고, 37.8%는 무조건 탈락시켰다. 기업들은 그 이유로 성격이나 성향을 판단(45.2%)할 수 있고, 그 역시 취업준비의 일부(43.8%)라 답했다. 명백한 외모 차별이었다.

성차별도 여전하다. 모집채용 공고에서 ‘병역필한 자에 한함’이나 ‘연구직(남성)’, ‘여성 임시직’, ‘몸무게 ○○kg 이하’라고 적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면접 과정에서의 성차별도 적지 않다. “남자친구가 있는지” 혹은 “결혼을 언제 할 계획인지” 또는 “결혼을 한 후에도 직장생활을 계속할 것인지” 묻는 질문 역시 그렇다. 결혼할 계획이 있으면 여성의 경우 취업과정에서 큰 감점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출신 혹은 가족 또한 취업에 있어 방해요소가 된다. 지난 2014년, 남양공업은 채용공고를 내며 ‘전라도와 외국인은 채용불가’라는 문구를 내걸었다가 홍역을 치렀다. 그뿐만 아니다. 취업준비를 하고 있는 박○○ 씨는 한 기업의 채용공고를 보고 지원서를 작성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집안 재산과 가계 소득을 묻는 칸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 씨는 “요즘 세상에 그런 걸 묻는 회사가 있어 놀랐다”며 당혹스러움을 표했다.

노력할 기회를 달라

어떤 이들은 ‘노력하지 않은 탓’이라며 손가락질하지만, 취업준비, 또 취업과정에서의 차별을 오로지 ‘노력하지 않아서’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회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진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모든 불평등은 누적되고, 또 누적된다. 이대로라면, 아마 내 학력과 내 신분과 내 직업 역시 (아직 없는) 내 가족과 자식의 죄가 될 것이다.

이것은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노력할 기회 자체가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누군가 노력하지 않아서 취업에 실패했다고 말하려면, 모두가 동일한 선상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그 노력이 진짜 무엇이었는지 드러나지 않을까. 지금의 취업 과정에서의 걸러내야 할 것 또한, 노력하지 않은 지원자가 아니라 각종 차별인 것으로 보인다. 이력서부터 바뀌어야 한다. 사진도, 성별로, 키도 몸무게도, 나이도, 혼인 여부도, 가족 관계도, 학교의 이름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일해낼 수 있는 역량이다.

봄이다. 참 예쁜 계절이다. 이 계절이, 이 꽃과 싹과 바람과 햇살이 취업을 앞둔 그 누구에게도 더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구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곳이 이곳이었으면 좋겠다. 봄은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

원문: lunpinnut.kr



예쁜 봄이 아픈 사람들